디지털 통화 시대, 화폐의 언번들링은 가능할까?

요즘 사람들에게 화폐는 다목적용이다. 그리고 화폐는 교환의 매개 수단으로서 가장 큰 의미가 있어 보인다.  화폐에 대한 이같은 인식은 옛날이나 지금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하지만 멀티 플레이어로서의 화폐가 존재감을 갖게 된 건 19세기 들어서일 뿐, 그전에는 화폐의 개념과 용도는 지금과는 달랐다고 한다.

책 '칼 폴라니, 새로운 문명을 말하다'를 보면 고대에는 다양한 용도를 위해 다양한 화폐들이 존재했다. 그러다 근대들어 다목적 화폐가 대세가 됐다. 

그럼에도 화폐는 기본적으로 교환의 매개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어야 다른 역할도 할수 있고, 이건 지금이나 원시 경제 구조나 다를게 없다보 보는 이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

시장 경제의 습관에 길이 든 우리들은 화폐란 교환의 매개 수단이라고 가정하고 있으며, 일단 화폐가 교환의 매개 수단으로서 기능을 확립하게 되면 그 다음엔 지불 수단, 가치 표준, 부의 보유 등에도 쓰일수 있게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런던경제대학에서 말리노프스키의 후임자로 교수에 취임한 레이먼드 퍼스는 브래태니커 백과사전 14판에서도 여전히 원시 통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원시적인 경제 시스템이라고 해도 어떤 물체를 진정한 화폐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이 명시적으로 공통의 교환 매개체로서 즉, 한가지 재화를 대가로 내놓고 다른 재화를 얻는 활동에서 편리한 디딤돌로서 가능할때 뿐이다. 이 물체는 그렇게 하는 가운데에서 한 걸음 나아가 가치 척도로서 즉 다른 모든 물체들의 가치를 자신을 단위로 표현해주는 것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이는 다시 새로운 기능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미래 혹은 과거의 지불에 대해 가치 표준으로 기능하며, 가치 저장 수단으로서 또 부를 응축하여 준비금으로서 보유할 수 있도록 해준다. 

칼 폴라니는 이에 대해 원시 통화는 지금과는 180도 달랐다고 주장한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자면 원시 통화의 진정한 특징은 이말과 정 반대에 가깝습니다. 19세기의 통화는 전목적적 화폐(all purpose money)가 되는 경향이 있었고, 또 라카도 경제학에서도 모든 상품 화폐는 당연히 전목적적 화폐라고 가정합니다. 하지만 원시 통화는 그와 거리가 멀었던 화폐입니다.  이는 특수 목적 화폐로서 각기 다른 여러 쓰임새마다 상이한 여러 화폐 물체들을 사용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 쓰임새란 사회학적으로 규정되는 특정한 상황에서 수량화가 가능한 물체들을 기초로 하여 혹은 이를 준거로 삼아 수행되는 여러 행동들을 뜻합니다.

이러한 관점을 택하면 화폐의 여러 제도적 기원이라는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에 대해 부분적으로 나마 대답이 나오게 됩니다. 그 여러 상이한 쓰임새들은 대개 서로간에 독자적으로 제도화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불에 쓰이는 물체들이 다를 수 있고, 표준으로 쓰이는 물체가 다를 수 있으며, 또 교환이 존재하는 경우라면 교환의 매개물로 쓰이는 물체들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때 교환이 존재하는 경우를, .....라면이라는 말로 가정하고 있음이 중요합니다. 왜냐면 화폐가 쓰인다고 해서 교환이라는 것이 반드시 존재해야할 필연성은 없기 때문이며, 사실을 보자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화폐에 대한 몇개의 서로 다른 정의들이 병존하는 것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사회 과학 일반의 여러 목적에서 보면 화폐란 대략 언어, 문자 기록, 도량형 등과 닯은 모종의 의미론적 시스템으로 정의해야 합니다. 그보다 좁은 의미에서 보면 화폐란 지불, 표준, 축장, 교환에 쓰이는 수량화가 가능한 물체들을 뜻합니다.

1. 지불이라는 갖가지의 책무를 이행하기 위해 수량과 가능한 물체들을 사용하는 행위입니다. 그 사회학적 상황은 이런저런 책무를 지고 있는 상황이며, 이에 해당하는 행동은 일정한 재화에 대한 점유권을 넘겨주는 것이며, 어떤 경우에는 채무자에게서 채권자 쪽으로 일정한 자산을 이전하는 행동이 수행되기도 합니다.

2. 가치 표준은 물물교환을 보편적으로 실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즉 물물교환 상황에 있는 양측이 등가를 위해 여러 많은 물건들을 추가하려고 할때 필요해집니다. 가치 표준이 발생하게 되는 또 다른 기원은 왕실에서 거두어들인 여러 주산물들의 관리로 이것들에 보관, 처분, 계획 등의 행동을 취하기 위해서는 이것들 사이에 등가 관계를 수립할 필요가 생기게 됩니다.

3. 수량화할 수 있는 물체를 축장하는 것은 단지 미래에 사용하기 위한 목적일 수 있으며 이런 경우에는 그렇게 쓰인 재화에 화폐의 성격을 부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다른 경우에는 화폐 물체, 즉 여타의 다른 화폐 용법에 쓰이는 물체들이 보화로서 축장될때가 있습니다. 

4. 교환이라는 화폐 용법은 가장 독특한 용법이며, 조직된 시장 이외에서는 거의 나타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용법으로 쓰이는 화폐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 밖의 화폐 용법들은 여전히 다른 화폐 물체들에게 맡겨질 떄가 많습니다.

함무라비 왕 시절 바빌로니아를 통해서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폭넓게 말해서 조세, 지대, 임금은 보리로 지불되었으며 여러 물품들의 등가 관계를 표현해주는 가치 표준은 은이었습니다. 교환 수단에 대해서 보자면 어떤 특정한 하나의 물체가 선호되었던 것 같지 않습니다.  보리, 기름, 양털, 은, 대추야자 등이 똑같이 인기가 있었으며, 그중 어떤 것도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법정 화폐가 지불, 교환, 가치표준, 축장 등 모든 역할을 담당하는 지금의 경제 환경에서 용도가 여러개로 쪼개진 원시 화폐의 개념은 효율성이 떨어져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암호화폐들을 보면 전목적적이 아니라 특정 용도에 초점이 맞춰진 것들도 적지 않다. 

한 화폐가 지불, 교환, 축장, 가치표준을 모두 커버한다기 보다는 비트코인은 가치 저장, 페이스북이 준비중인 리브라는 지불 등 각자 강조하는 역할이 다른 암호화폐들이 많다.  모 업체 관계자는 비트코인은 금이요, 이더리움은 철이며, 리플 XRP는 구리 성격의 암호화폐"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원시 화폐 경제 시스템이 암호화폐를 타고 부활할 수 있을지는 속단하기 이르지만, 책을 보고 나서 지금처럼 전목적적인 화폐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대세가 될 수 있을지 그냥 한번 묻고 싶어졌다. 화폐의 언번들링(unbundling)은 말도 안되는 상상인지, 아니면 디지털 경제 시대 그럴듯한 시나리오인지에 대해서도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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